괴력난신怪力亂神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꾸밈을 압도하면 야하고, 꾸밈이 바탕을 압도하면 사하다.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루어야 군자라 말할 수 있다.”
6.18.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특이한 조화다. ‘야’는 ‘도’와 어울린다. 촌스러움과 도회적 딱 이 말이 적절하다. 물론 ‘사’라고 틀리지는 않다. 사史는 사관이긴 하지만 당시의 ‘사’는 기록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에 밝으며 경우에 따라선 제사와 점복까지 담당하던 최고위급 관리이므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층이다. 속된 말로 먹물 먹은 놈이고 가방끈이 엄청 긴 사람들이다. 생각해보니 지금도 촌놈이란 말은 있지만 도시놈이란 말은 없다. 이상하긴
하다. 그래도 춘추 시대에는 ‘야’에는 ‘도’가 어울린다.
‘어서 오십시오, 경기도 OO입니다.’ 이제는
국경뿐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도 도와 도, 도시와 도시의 경계가 칼처럼 그어져 있다. 비록 눈에는 그 선이 보이지 않지만 인터넷으로 지도를 열면 경계가 뚜렷하다.
춘추 시대의 국가는 아직 영토국가의 단계는 아니었다. 노나라라고 하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성과 여러 개의 주요 성읍들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때로 노나라의 성읍이지만 다른 나라의 도성에 더 가까이 치받고 들어가 있는 곳도 있다. 성읍과 성읍 간의 점조직으로 연결된 것이 당시의 국가다.
공자로부터 이제 100여년이
채 지나지 않으면 각 나라는 주요 도시에 성벽을 쌓았던 것에서 한발 더 나가 국경에 장성을 쌓고 경계와 수비를 강화한다. 진 시황제에 의해 통일된 후 중원 외곽에 있던 조나라, 연나라 등의
장성을 진나라의 그것과 연결시키는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이는데 그 결과물이 만리장성이다.
당시 성
안에 살던 이들을 ‘국인’으로, 성밖 교외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이들을 ‘야인’이라 불렀다. 두 계층은 그 신분과 권리와 의무에서 확연하게 구분된다. 국인은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좌전』에 보면, 나라에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귀족들은 국인들을 소집해 그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진나라 혜공(문공의 아우 이오)이 진 헌공에게 한원에서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 있을
때도 정부는 국인들을 소집해 국정을 쇄신했다. 이들의 권리가 참정권이라면 의무는 전사다. 즉 전쟁이 발발하면 전사로서 전장으로 출동한다. 이외 각종 예기와
생활용품을 제조하는 장인들 역시 성 안에 거주했지만 이들은 전사가 아니다.
전국시대의
자료이므로 춘추시대를 정확히 반영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제법 큰 나라에는 삼군이 편제되어 있고, 각
군은 12,500명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삼군이라면 37,500명의 전사들, 즉 국인들이 성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성읍과
성읍 사이의 공간에는 경작지도 있지만 농사지을 수 없는 버려진 들판이 더 많았다. 철기로 관개시설을
연결하기 전까진 농사는 경작지 근처의 하천과 천수 즉 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을 댈
수 없는 들판은 버려져 있다. 춘추시대 야인은 성밖에 살며 농사에 종사하고 생산물을 납부하는 농민들이다. 그들은 전쟁에 동원되지 않는다. 당시의 전쟁은 귀족들의 전쟁이고
전차가 주력인 전투였으며 농민이 동원되는 ‘농민개병’, ‘병농일치’의 시대는 전국시대에 가서야 등장한다.
공자는
본래 성밖에서 농사를 짓던 ‘야인’들의 성정을 질박함의 정수로
생각했던 것 같다. 꾸밈없이 순박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 그래서
도성 안에 살면서 배운 것 많고 화려하고 그래서 말도 교묘하고 낯빛도 속일 수 있는 세상에 찌든 사람들의 반대에 세워 양자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
“중국이 무속으로부터 벗어난 경로는 종교(정서와 신앙)와 과학(사변과 이성)을 분리하는 방향이 아니고, 정情에 이理를 융합하고 정과 이를 합일하는 방향이었다. 그것을 이 장에 적용하면, 즉 ‘질박함’은 정서이고, ‘문채’는 이성이다. ‘질박함이 문채를 초과하면’ 동물에 가깝지만 생명력이 있고, ‘문채가 질박함을 초과하면’ 기계와 같아서 더욱 두려워할 만하다.” (이택후, 『논어금독』)
어느 쪽이든
치우친 것을 공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공자는 문채가 질박함을 압도하는 상황을 더 우려했다고 이택후는 해석하고 있다. 그것이 극에 달하면 기계와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정서가 없는 이성의
결정체 인공지능이 이성과 정서를 겸비한 인간 이세돌을 꺾은 지 벌써 오래 전이다. 만약 인공지능이 좀더
인간에 가까워져 정서까지 가지게 된다면 오히려 인간과 겨룰만하지 않을까, 상대의 기를 느낄 수 있고, 생사의 두려움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고 오직 합리적 판단만
가능한 상태로 절정에 이른다면 인간은 완벽한 기계인 인공지능을 두려워야한다.
【관련
주석】 포함: “야野는 야인과
같으니 비루하고 소략한 것이다.”, “사史란 꾸밈이 지나치고 본질이 너무 적은 것이다.”, “빈빈彬彬이란 꾸밈과
본질이 잘 조화를 이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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