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력난신怪力亂神
계씨가 민자건을 비읍의 재로 삼으려 했다. 민자건이 말했다. “나를 위해 잘 말해 주시오. 만약 다시 나를 찾는다면 나는 문수汶水 근처에
가 있을 것이오.”
6.9. 季氏使閔子騫爲費宰.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
노나라 도성 곡부를 기준으로 보면 비읍은 동남쪽, 문수는 동북쪽에 있다. 비읍에서 멀리 도망친다는 말일 수도 있고 문수 건너는 제나라 땅이므로 나라를 떠나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 ‘비’는 계씨의 시조 계우가 희공을 옹립한 공적으로 하사받은 땅이다. 계씨가 소유한 여러 읍 중에서도 으뜸가는 종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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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나라 비읍 |
공자 당대로부터 200여년
전 춘추 초기에 정나라 장공의 태자, 공자홀이 있었다. 이
친구는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받은 제나라의 구원 요청에 응해 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제 희공은
홀의 비범함에 반해 당대의 미녀로 소문난 딸 ‘문강’ – 이
이름은 노 환공의 부인으로서 사후의 시호이므로 본명은 아닌데 당시 여인네들의 본명은 알기 어렵다 – 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지만 의외로 홀이 사양했다. 거절한 이유는 이렇다.
군주의 명을 받아 이웃을 구원하러 와서 공적을 세운 후 부인을 얻는다면 이는 공무를 사적인 이익에 사용하는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좌전』에 소개된 이 기사에 대해 군자는 묘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개인을 위한 것으로는 올바른 처신이었다’고.
춘추 시대 초기에 정나라를 중원의 최강국으로 이끈 장공이 서거하고
홀이 즉위했지만 이웃 송나라의 견제로 송 출신의 여인의 소생 여공이 즉위하고 홀은 축출되었다.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다면 정나라의 위세는 다소 길게 유지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공도 친송 세력을 축출하려다
되려 쫓겨났고 홀(소공)이 복귀했지만 곧 사망한다. 그 뒤를 이은 군주와 지방에 머물며 호시탐탐 도성을 엿보던 여공은 십 수년만에 다시 군주를 몰아내고 복귀하는데
성공은 했지만 오랜 분쟁을 겪으며 선대의 위세를 잃고 송나라, 제나라,
초나라의 간섭과 침략에 시달리는 소국의 처지로 떨어졌다. 군자가 평했던 ‘개인을 위한 생각으로는 옳았다’는 것은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아는 사람으로서
내린 평가였을 게다. 개인의 도덕적 비난보다는 그는 태자로서, 공인으로서
나라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제나라 같은 강대국을 사돈으로 맺어 밖의 지원자를 얻어
후계의 지위를 튼튼히 했다면 정나라의 쇠퇴는 좀더 먼 훗날의 일이 되었을 것이다.
민자건은 개인의 깨끗함을 우선했다.
스승도 정치 참여를 위해 열국을 주유한 바 있는데 군주의 도덕성을 따지고 나라의 대소를 가리며 정치의 좋고 나쁨을 따졌다면 사실상
그 당시에 공자의 기준에 맞는 나라도, 군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공자는 정력이 소진될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비아냥과 굴욕을 인내하면서. 민자건의 행동엔 절반의 찬성만.
【관련 주석】 공안국: “비費는 계씨가 소유한 읍으로, 계씨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가신이 수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민자건의 현명함과 어짊을 보고
그를 가신으로 쓰고자 하였다.”, “문수 근처로 떠나겠다는
말은 (다시 나를 찾는다면)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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