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력난신怪力亂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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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난신 선생님께선 괴·력·난·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   논어.술이.21. 子不語 : 怪 · 力 · 亂 · 神 .   단옥재는 글자 ‘ 어 語 ’ 에 ‘ 상대와 토론하여 시비를 가리는 ’ 의미가 있다고 풀이한다 . 그러므로 공자는 이 네 가지에 대해 단지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   상나라 왕 – 정인 집단의 우두머리   상나라 시대는 주술과 제사의 시대였다 . 만사 점을 쳐 하늘의 뜻을 물었고 , 다섯 가지 정기적 제사를 정교하게 한 해에 딱 들어맞게 배치했기 때문에 상나라는 한 해를 ‘ 사 祀 ’ 라고 표기했다 . 이런 표기 관습은 주나라 초기에도 여전히 잔존재 유명한 「홍범」의 첫 문장도 “13 년째 되는 해 ( 무 ) 왕이 기자를 방문했다 ( 惟十有三祀 …)” 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   20 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상나라의 도읍 은허의 발굴이 시작되었고 이곳에서 수 만개의 문자가 쓰여진 갑골들이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수많은 갑골들의 시대를 파악하고 분류할 때 점을 친 ‘ 정인 貞人 ’ 의 이름을 가지고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이 효과적임을 알아챘다 . 정인은 왕명을 받아 점을 치고 그 결과로 나온 조짐을 보고 해석하는 권위를 가진 무당이다 . 학자에 따라서 상나라 시대의 왕은 이 정인 집단의 우두머리 무당으로 보는 이도 있다 .   상나라의 왕은 죽어서 제사를 받은 대상인 동시에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서 죽더라도 하늘의 상제 옆에 자리잡아 땅의 왕과 하늘의 상제를 매개하는 두 가지 지위를 가진 존재였다 . 이런 사고방식은 주나라 초까지도 잔존하여 「금등편」에서 주공은 상제 옆에 계신 문왕과 선조들에게 병환에 든 무왕 대신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것을 호소 심지어 협박했던 것이다 . 이런 사고의 틀에서 본다면 상나라의 왕은 직접 상제와 교통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여기엔 선왕이라는 매개가 ...

저우언라이와 헨리 키신저

 

계씨가 민자건을 비읍의 재로 삼으려 했다. 민자건이 말했다. “나를 위해 잘 말해 주시오. 만약 다시 나를 찾는다면 나는 문수汶水 근처에 가 있을 것이오.

 

6.9. 季氏使閔子騫. 閔子騫: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上矣.

 


노나라 도성 곡부를 기준으로 보면 비읍은 동남쪽, 문수는 동북쪽에 있다. 비읍에서 멀리 도망친다는 말일 수도 있고 문수 건너는 제나라 땅이므로 나라를 떠나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계씨의 시조 계우가 희공을 옹립한 공적으로 하사받은 땅이다. 계씨가 소유한 여러 읍 중에서도 으뜸가는 종읍이다.




노나라 비읍



 

헨리 키신저의 카운터 파트너



 

“60여 년의 공직 생활에서 나는 저우언라이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키신저는 그의 저서 『중국이야기(On China)』에서 살얼음 걷듯이 조심스럽게 미중 간의 관계를 재개하는 물밑 협상에서 자신의 카운터 파트너를 맡은 상대를 이렇게 회고한다. 어떤 자리에서든 좌중을 휘어잡고 지배하며 반대를 압도하려는 열정적인 1인자 마오쩌둥 밑에서 저우언라이는 반대를 설득하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수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겸손함으로 좌중을 파고들었다. 덩샤오핑도 우리가 모두 녹다운 되었던 문화 혁명시기에도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다. 당시 그는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을 많이 했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용서했다1980년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회술했다.


진정한 정치가는 자신에 대한 윤리적 비난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오해와 치욕을 감내하고 자신이 맡은 사명을 망각하지 않는다. 저우언라이는 동지들에게 심지어는 마오쩌둥에게서 변절자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정계에서 구차하게 살아남았고 중국의 지속가능한 생존과 발전을 위해 미중관계를 재개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수행한 후 정계를 은퇴했다.




                              사적인 비난을 감수한 공적인 인간



 

공자 당대로부터 200여년 전 춘추 초기에 정나라 장공의 태자, 공자홀이 있었다. 이 친구는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받은 제나라의 구원 요청에 응해 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제 희공은 홀의 비범함에 반해 당대의 미녀로 소문난 딸 문강’ – 이 이름은 노 환공의 부인으로서 사후의 시호이므로 본명은 아닌데 당시 여인네들의 본명은 알기 어렵다 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지만 의외로 홀이 사양했다. 거절한 이유는 이렇다. 군주의 명을 받아 이웃을 구원하러 와서 공적을 세운 후 부인을 얻는다면 이는 공무를 사적인 이익에 사용하는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좌전』에 소개된 이 기사에 대해 군자는 묘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개인을 위한 것으로는 올바른 처신이었다.



춘추초기 정나라의 공실 세계


 

춘추 시대 초기에 정나라를 중원의 최강국으로 이끈 장공이 서거하고 홀이 즉위했지만 이웃 송나라의 견제로 송 출신의 여인의 소생 여공이 즉위하고 홀은 축출되었다.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다면 정나라의 위세는 다소 길게 유지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공도 친송 세력을 축출하려다 되려 쫓겨났고 홀(소공)이 복귀했지만 곧 사망한다. 그 뒤를 이은 군주와 지방에 머물며 호시탐탐 도성을 엿보던 여공은 십 수년만에 다시 군주를 몰아내고 복귀하는데 성공은 했지만 오랜 분쟁을 겪으며 선대의 위세를 잃고 송나라, 제나라, 초나라의 간섭과 침략에 시달리는 소국의 처지로 떨어졌다. 군자가 평했던 개인을 위한 생각으로는 옳았다는 것은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아는 사람으로서 내린 평가였을 게다. 개인의 도덕적 비난보다는 그는 태자로서, 공인으로서 나라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제나라 같은 강대국을 사돈으로 맺어 밖의 지원자를 얻어 후계의 지위를 튼튼히 했다면 정나라의 쇠퇴는 좀더 먼 훗날의 일이 되었을 것이다.




민자건은 개인의 깨끗함을 우선했다. 스승도 정치 참여를 위해 열국을 주유한 바 있는데 군주의 도덕성을 따지고 나라의 대소를 가리며 정치의 좋고 나쁨을 따졌다면 사실상 그 당시에 공자의 기준에 맞는 나라도, 군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공자는 정력이 소진될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비아냥과 굴욕을 인내하면서. 민자건의 행동엔 절반의 찬성만.



 

【관련 주석】 공안국: “비는 계씨가 소유한 읍으로, 계씨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가신이 수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민자건의 현명함과 어짊을 보고 그를 가신으로 쓰고자 하였다., “문수 근처로 떠나겠다는 말은 (다시 나를 찾는다면)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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