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력난신怪力亂神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널리 문헌에서 배우고, 예로써 배운 것을 갈무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6.27. 子曰:
“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유럽의 귀족들이 자녀를 사교계에 입문시킬 때 거창한 무도회를 열고
공작, 후작, 백작, 남작
등 나라에서 방귀 좀 뀌는 귀족들을 초대해 자녀들을 소개한다. ‘duke’를 ‘공작’으로, ‘marquess’를
‘후작’으로, ‘count’를
‘백작’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고대 중국의 다섯 등급의 제후를
번역어로 채용한 것이다. 영국에서나 쓰는 ‘Sir’를 ‘경’으로 번역하는 것 역시 고대 중국의 주요 대신을 ‘경卿’으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강
태공, 주공 단, 소공 석이 서주 시대 초대 세 명의 ‘경卿’이었다. 제나라의 군주는
‘공公’의 등급으로 가장 높다. 그래서 우리는 첫번째 패자를 ‘제 환공’이라 부르는데 이는 주나라가 제나라에 ‘공’의 작위를 하사했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진 문공’의 작위는 문헌 상 작위가 공의 아래인 ‘후侯’이다. 그러므로 본래는
진 문후로 불러야 하지만 우리가 그까짓 작위가 무슨 소용인가, 그냥 편한 대로 부르면 된다. 요즘 중국에선 전통 시대 황제 역시 모두 시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 시안
여행을 갔을 때 중국인 가이드는 당 태종을 ‘태종’이 아닌
‘이세민’이란 그의 이름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고대 중국의 귀족도 자녀, 특히 가문의 후계자를
정하면 이를 널리 나라에 알리는 행사를 거행한다. 문헌을 보면 귀한 청동으로 ‘종’이나 기타 보배로운 기물을 제작하게 명하고 이 기물을 완성하면
귀족들을 초대해 ‘낙성식’을 거행하하기도 한다. 오늘날 건물을 완공한 후 거행하는 낙성식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귀족들에게 낙성식을 통지하면 집안은 후계를 선포하는 의식 준비로 분주하다. 기원전 550년, 그러니까
우리 공자 선생님께서 첫돌을 맞이한 해인데 당시 권세가 계무자도 후계를 정할 때가 다가왔는데 고민이다. 안타깝게도
그에겐 정부인에게서 태어난 적장자는 없었고 첩에게서 얻은 아들이 여럿 있었다. 서열로는 ‘공미’를 후계로 삼아야 하는데 그가 아끼는 아들은 ‘도자’라는 녀석이었다. 중국엔
종법이란 엄격한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계무자라 하더라도 명분없이 서열을 바꿀 수는 없었다. 고민을
하던 그는 똑똑함으로 이름난 장무중에게 상담을 청했는데 무중은 껄걸 웃으며 나한테 맡기라고 하고 손님을 초대할 때 자신을 ‘상객’ 즉 주빈으로 지명하라고 말했다. ‘상객’이란 호스트를 제외하고 연회에 초대된 인물들 중 우두머리다.
주빈은 연회를 이끌어가는 인물로서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즉 악장(concertmaster)과 유사하다. 악장은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
오케스트라의 악기 파트를 순서대로 튜닝한다. 이 작업을 마치면 지휘자 즉 호스트가 관객의 갈채와 함께
등장하고 연주가 시작된다.
이제 계씨의 연회장으로 돌아가면 장무중은 상객으로서 연회의 개시를 알리는 헌주를 제안하고
거행한 후 시종에게 명한다. 호스트인 계씨 바로 앞에 두 겹의 방석을 깔게 하고 새 술잔을 재차 깨끗이
씻어오게 명했다. 그러더니 장자 공미가 아닌 도자를 호출했다. 도자가
연회장에 들어서자 장무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자, 주빈이
일어서니 다른 손님들도 급히 엉덩이를 들 수밖에 없다. 참석자 모두가 일어선 가운데 무중은 도자에게
다가가서 그를 준비한 자리에 앉혔다. 그후에 장자 공미를 부르더니 그에겐 다른 손님들과 나이를 따져서
순서대로 뒤에 앉게 했다. 이것으로 계씨의 후계는 정해졌다. 별도의
선포 없이도 노나라의 모든 귀족들은 계씨의 후계가 공미가 아닌 도자로 지명되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관례를
이용해 법을 훼손한 것이다.
“지혜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장무중같은 지혜로도 노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았으니 다 이유가 있다. 일을 도모할 때 순리를 따르지 않았고, 일을 시행할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서」에 말한다. ‘이 일을 나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라.’ 이는 사리를 따르고 남의 마음을 헤아려 일을 시행하라는 뜻이다.”
이는 훗날 공자가 장무중의 지혜와 행동을 평한 말이다.
그는 남의 고민을 손쉽게 해결할 만한 총명함과 박식함을 지녔지만 예로 갈무리하지 못했다. 공미의
원한을 산 무중은 공미와 맹손씨의 협공에 걸려 제나라로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무중은 뒤늦게 “고통 없는 질병은 따끔한 침보다 못하다. 대저 따끔한 침은 나를 살리지만 고통 없는 질병은 그 피해가 더욱 심하다”라고
자책하고 반성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관련 주석】 정현: “불반弗畔이란 도에 어긋나지 않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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