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력난신怪力亂神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몇
두름의 말린 생선을 갖추어 제 발로 찾아온 사람에게 내 일찍이 가르침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논어.술이.7. 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수작酬酌’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술을 서로 주고받음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 실생활에선 “남의 말이나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주로 사용된다. 대부분의 예문도
아름답지 않다.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가다” 아니면
“네놈이 나를 속이혀고 수작을 부리는구나.” 등이다.
본래 ‘수작’은 매우 고풍스러운 의례였던 ‘향례’에서
비롯된 말이다. 고대의 향례에선 먼저 호스트(주인)가 손님(빈객)에게 술을
권하는데 이를 ‘헌獻’이라 한다. 권함을
받은 손님은 공손하게 술잔을 호스트에게 돌려주는데 이를 ‘작酢’이라 한다. 이에
주인이 먼저 술을 마시고 이어 빈객에게도 술을 마시길 권하니 이를 ‘수酬’라고 한다.
헌, 작, 그리고 수를 합친 이 일련의 세트를
‘일헌一獻’이라고 부른다.
이 의례에서 빠지지 않는 행위가 호스트나 빈객이
시를 읊어 의사를 완곡하게 전하고, 또 예물을 갖추어 올리는 데 이 때 사용되는 예물을 ‘수폐’라고 한다. 상대
역시 시를 읊어 화답하고 예물을 전달한다. 향례는 이런 복잡한 프로토콜이 있기 때문에 주객 쌍방이 모두
술과 음식을 편하게 먹거나 마시지 않고 향례가 끝나고 연회가 시작되어야 편하게 먹고 마시게 된다. 현대의
외교에서 업무인 회담을 마치고 오찬이나 만찬을 즐기는 것과 유사하므로 향례는 회담에 가깝고 연회는 만찬에 비할 수 있다.
신분에 따라 ‘헌’의 회수도 다르다. 신분의
고하에 따라 최대 ‘구헌’에서 둘씩 감하여, ‘칠헌’, ‘오헌’ 등으로
내려간다. 세트의 수가 많을수록 오가는 예물의 규모가 커진다.
기원전 541년 진秦 환공의 아들이며 경공의 아우인 진의 공자 후자가 망명길에 올라 이웃 진晉나라로 향했다. 모친은 혹여 그가 형에게
해를 입을까 걱정해서 나라를 떠나있을 것을 조언했고 이를 따른 것이다.
망명객 신분인 그가 패자 진 평공에게 향례를 베풀었는데, 진秦의 수도 옹雍에서 진의 수도 강絳까지 하천에 배를 잇대어 다리를 만들고, 10리 마다 수레를 배치해 향례에 사용할 예물을 수송했다. 예를
마칠 때까지 후자는 아홉 번의 헌을 거행했다. 그 예물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어마어마한 규모였을
것이다. 사마후라는 진나라의 신하가 그 규모에 놀라 후자에게 귀하가 가진 수레를 모두 끌고온 것이냐고
묻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규모가 아니면 제가 어찌 패자를 접견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나라를 대표한 정치인은 국익이 첫번째이고, 당을 대표한 정치인은 당의 이익이 우선이다. 정치란 좋게 보면 고도의
예술 행위일 수 있지만 일반인의 시각에는 ‘무소불위’ 즉
못할 짓이 없는 인물이고 믿을 수 없는 언사를 늘어놓은 사람들일 수 있다. 시를 읊고 고풍스럽고 향례에서
비롯된 ‘수작’이란 말이 점차 부정적인 용법으로 변하게 된
것은 정치계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공자는 살아 생전에도
박학다식으로 중원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는 몇 두름의 말린 생선이라도 예를 갖춰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면 거절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말린 생선은 귀한 예물은 아니다.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이 구비할 예물이 아니니 공자는 배움을 갈구하는 이의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지견례의
본래 원칙, 즉 예물은 찾아온 자의 신분을 드러낼 뿐 예물을 받는 자의 지위나 영향력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지킨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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